3. 역사적 배경


SECTIONS

3-1-1. 식민지화된 한국, 일본의 제국주의, 그리고 전후 관계

3-1-2. 기억의 정치


3.1. 역사적 배경

서문

모든 이야기에는 여러 다른 면이 존재한다. 최근 있었던 논란과 그에 대한 세계 언론의 보도를 살펴보면, 발행된 기사가 의제, 편향, 지식적 기반등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서술적 다름 때문에 언제나 균형이 잘 맞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서술방법상의 차이는 일반 대중이 정보를 소비, 반응, 행동하는 방식에도 마찬가지로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역사의 구성도 이와 같은 과정을 거친다. 물론 역사에서는 ‘절대적 객관성’을 이상적으로 여기지만, ‘역사적 서술’이라는 개념은 역사에 대한 다양한 선택과 해석이 필연적임을 보여준다. 역사적 서사는 절대적 객관성과는 판이한 경우가 많다. 서로 다른 사람이 다양한 이유로 역사적 사건에 대한 서로 다른 기억과 해석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층위가 다양한 한일관계가 이러한 역사 서술의 차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세계 언론이 한국의 시점을 상당부분 도외시하거나 오해했다고 생각하며, 이번 사건이나 지정학적 긴장을 맥락과 관련지어 이해하려면 과거 한국에 대한 일본 제국의 침략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이번 장은 1900년부터 현재까지 한국의 역사, 특히 식민통치 기간의 역사에 대한 개요를 주로 다룬다. 또한 중국 및 동남아시아 일본 식민지에 대한 간략한 언급을 통해 일본 제국주의가 끼친 광범위한 영향과 그 흔적을 설명함으로써 조금 더 국제적인 맥락을 제공한다. 본 주제에 대해 보다 깊이 알기를 원하는 독자는 ‘추천 자료’를 참고하기를 바란다.

3-1-1. 식민지화된 한국, 일본의 제국주의, 그리고 전후 관계

식민지화 이전 (~1910년)

한반도는 수 세기 이전부터 일본, 중국, 러시아와 같은 주변 국가에게 유리한 지리적 조건을 차지한 곳으로 여겨지면서 자연스럽게 영토 분쟁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1800년대 후반부터 1900년대 초반까지 일본과 러시아는 한반도의 지배권을 두고 전쟁을 벌였다. 1904년부터 1905년까지 이어진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하면서 두 국가는 1905년 포츠머스 조약을 체결하게 되는데, 그 결과 일본은 ‘보호국’이라는 미명 하에 한국에 대한 지배권을 묵인받음과 동시에 만주와 랴오둥반도(遼東半島)를 차지할 수 있게 되었다. 포츠머스 조약은 한국의 자주권과 자치권이 막을 내리고 외세와 외국의 지배를 받게 된 시발점이 되었다.

이후 본격적인 국권 침탈이 이루어진 것은 한일병합조약(韓日倂合條約)이 맺어진 1910년 8월 22일로, 이날로부터 혼란스러운 35년간의 일제 통치 기간이 시작되었다.

무단통치기 (1910~1919)

식민 시대의 첫 10년은 “극심한 통제와 억압” (Hwang, 2017 [9])으로 점철된 군사 통치 기간이었다. 이 기간에 일본은 한반도 지배권을 유지하기 위해 저항 운동 세력을 뿌리 뽑고자 했으며 (Hwang, 2017 [9]) 그러한 정책의 일환으로 한국의 언론·교육·집회의 자유 등 모든 기본권을 박탈하였다. 무단 통치가 강행되면서 수많은 헌병 경찰이 한반도에 배치되었으며 이는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 세력을 낳게 된다.

그러나 한국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독립은 요원한 일이 되어버렸는데, 이는 서양 강대국들이 자신들의 전략 지정학적 이해를 좇아 일본을 지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National Museum of Korean Contemporary History, 2018 [15]). 심지어 서양 국가들이 모여 민족 자결권을 행사한 파리 강화회담에서도(Manela, 2017 [12]) 유럽 이외의 국가들에 대한 민족 자결권은 인정되지 않았다. 민족 자결권은 유럽의 “문명화된” 시민들의 것이지, 아시아와 아프리카 시민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다고 여긴 것이다. (Manela, 2017 [16]).

3·1운동의 영향과 문화 통치기 (1919~1931)


사진 15: 여성과 어린이를 포함한 수천명의 한국인들이 손을 들고 “만세”를 외치며 서울의 성 밖에 집결한 모습. 출처 http://digitallibrary.usc.edu/

1919년 3월 1일, 수천 명의 한국인들이 서울의 탑골 공원에 모여 일본제국 정부에 저항해 독립을 선언했다1. 비록 3·1운동에 참여한 사람의 정확한 통계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대략 50만에서 100만의 한국인이 참여했다고 하며, 사망자와 부상자 수만 각각 7,000명과 1,400명을 상회하며 14,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체포되었다 (Baldwin 1969, [3]).  

3·1운동의 결과로 일본 정부는 한국의 저항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기존의 통치 방식을 다소 완화했다. 아예 금지되었던 신문은 1920년부터 1931년까지는 철저한 감시 아래 발행을 허가했고, 정치적 긴장은 제한적으로 완화되었다. 문화 통치기는 이러한 정책 변화와 더불어 상당한 규모의 도로, 철도, 학교와 같은 사회 기반시설 건설과 함께 농업 외의 산업 분야를 발전시킨 기간이었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Hwang, 2017 [9]).

당시 새로 파견된 사이토 마코토 총독의 새로운 개혁안은 “관료제와 경찰력을 강화하는 동시에 표면적으로는 회유적인 접근법을 취해 한국인들이 사회·경제·문화적 활동에 더욱 자유롭게 참여하게 하는 (Hwang, 2017 [9])” 것이었다. 이 개혁은 한국인을 식민 체제에 가담하게 함으로써 내부 분열을 조장하려는 데에 목적을 두고 있었다. 식민 시대 초기부터 활동해 온 저항 단체들은 이제 일본 제국과 손잡을 것을 권고하는 한국인과 맞붙어야 하는 입장이 되었다.  

전시 동원과 민족 말살 통치기 (1931~1945)

3·1운동 이후 규제들이 다소 약화되었다지만 1930년대에 들어 일본은 중국과의 무력 충돌이 증가하고 마침내는 제2차 세계대전에 뛰어들면서 한국을 더욱 가혹하게 억압하기 시작했다. 일본은 나치 독일과 동맹을 맺고 ‘추축국 연합(Axis Alliance)’을 결성했다.

일본의 참전은 한국에게는 고유의 민족 정체성을 앗아가는 일이었을 뿐 아니라 수탈과 잔학 행위를 뜻하기도 했다 (Hwang, 2017 [9]).  한국을 지배하고 독립운동을 억압하기 위해 일본이 펼친 정책은 ‘내선일체’에 의거한 민족 말살 정책이었다 (The Cyber University of Korea, 2016, 17:37 [21]; Eckert, Lee, Lew, Robinson, & Wagner, 1990 [5]). 일본 정부의 의도는 신사 참배 강요와 창씨 개명 등의 정책을 통해 한국인을 일본 문화에 동화시킴으로써 한국인의 정체성을 완전히 지우는 것이었다. 그 예로 1938년에는 중등학교에서, 1943년에는 소학교에서 한국어 사용이 금지되었고 강제 일본어 교육이 시행되었다 (The Cyber University of Korea, 2016 [21]; Eckert, et al., 1990 [5]).

전쟁으로 인력이 부족했던 일본은 1938년부터 한국인을 강제 징용해 일본으로 끌고 가기 시작했다. 일본 군대로 강제 징병 된 한국인의 숫자는 전쟁이 끝날 즈음엔 도합 36만여 명에 육박했다. 이 중 절반 정도가 사망했으며 강제 노역을 포함해 일본의 전쟁에 동원된 한국인의 숫자는 6백만 명에 이른다 (The Cyber University of Korea, 2016, [21]). 끌려간 한국 노동자들은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임금도 받지 못한 채 살아남을 확률마저 희박한 비참한 생활을 이어가야 했다 (Hwang, 2017 [9]). 게다가 강제 노역으로 일본에 있던 노동자 중 4~5만 명의 한국인들은 원폭 투하로 목숨을 잃었다(Lee, 2018 [14]; English translation).

착취당한 것은 비단 남성만이 아니었다. 12세부터 40세까지의 한국 여성들은 ‘위안부’로 끌려가 일본 군인을 대상으로 성노예로 착취를 당해야 했다. 많은 이들이 “경제적 보상을 미끼로 유인당하거나 납치당하거나 협박을 당했”으며, 생존자들은 1990년대가 되어서야 “자신들이 겪은 고통과 역경을 드러내기 시작했다.”(Hwang, 2017 [9]). 이렇게 일본군의 손에 강간 및 학대를 당한 한국 여성의 숫자는 10만에서 20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The Cyber University of Korea, 2016, [21]).

한국 외 국가에서의 일본 식민통치

일본 제국의 핵심적 식민지는 한국이었지만 중국, 대만,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미얀마와 필리핀 등의 국가도 마찬가지로 일본의 지배로 고통을 받아야 했다.

버마 철도(Burma-Thai Railway)건설에 동원된 잔혹하고 악명높은 강제노동은 일본의 제국주의적 야망이 얼마나 멀리 뻗어 나갔는지를 한눈에 잘 보여준다. 버마와 태국의 철로를 잇기 위한 공사였던 버마 철도건설은 1942년에 시작되었다 (Kratoska, 2005 [13]). 일본 제국 시대 가장 대규모의 공사였던 버마 철도 건설에는 18만 명의 말레이시아와 버마(현재 미얀마) 인부들(출처에 따라 정확한 숫자는 차이가 있음)에 더해 태국, 인도네시아, 베트남과 유럽 전쟁 포로까지도 동원되었다. 유럽 전쟁 포로의 대부분은 1942년에 사망하였으므로 아시아 국가의 노동자가 투입된 것은 1943년 중반이다. 이 노동자들의 대부분은 버림받거나 콜레라 창궐로 사망했다 (Kratoska, 2005 [10]).

일본이 자행한 성 노예 징집은 한국에 국한되지 않았다. 아시아 태평양 지역 다수의 국가에서 수많은 여성이 납치당하고 착취당했다. ‘위안부’라 불린 이 여성 중 다수는 한국 여성이었지만 말레이시아나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 아시아 국가에서 징집당한 여성들도 마찬가지로 동남아시아 국가로 끌려 왔다 (Amnesty Report, 2005 [2]). 피해자들은 자원봉사자나 간호사로 위장되어 완곡하게 말해 제국 전역에 배치된 군대 내 ‘위안소’라 불리는 곳에서 일하도록 이송되어 왔다. 그러나 이 ‘위안소’가 실제로는 강제 성행위로써 일본군에게 ‘위안’을 주는 군용 공창가였다는 사실은 전쟁이 끝난 후에 밝혀졌다 (Kratoska, 2005 [10]). 심지어 전쟁이 끝난 후에도 성 노예 피해자들은 전시의 냉혹한 기억에 괴로워하고 있다고 증언한다. 생존자인 필리핀인 롤라 피딩(Lola Piding)씨는 전쟁이 끝난 후에도 오랜 시간 동안 남편조차 믿기 힘들었던 기억을 회상했다.

기억이 너무나도 고통스러워서 나는 어떤 일을 겪었는지조차 털어놓을 수가 없었다.
남편과 잠자리를 할 수도 없었고, 그렇게 하기까지 3년이 걸렸다.
모든 것을 묻고 잊으려고 노력했다.
군복을 입은 남성을 보면 아직도 공황 상태에 빠지고 공포에 질린다.

(Amnesty Report, 2005 [2])

사진 16: A Lemon. 말레이시아 페낭으로부터 ‘군 위안부’로 일하도록 강제로 끌려온 중국과 말레이시아 여성들. 출처 http://media.iwm.org.uk

이 밖에도 일본 식민통치가 자행한 잔학행위를 경험한 부분이 많지만 백서의 성격상 우리는 한국의 역사를 집중적으로 조명했다. WPP팀이 수집한 다른 정보는 ‘추천 자료’에서 확인 할 수 있다. 본 주제에 대해 더 알기 원하는 독자들에게 좋은 첫걸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광복과 식민 통치의 종료

해외에서 활동을 하며 항일 운동을 조직한2 독립투사들3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외국의 개입 없는 자주적 독립을 결국 이루어 낼 수 없었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었다. 폭탄의 사상자와 피해로부터 회생이 불가능해진 일본은 마침내 2차 세계 대전의 패전을 인정했다. 이는 한국을 포함해 일본의 식민 지배하에 있던 많은 국가에는 광복의 시점이 되었다. 이들에게 원폭 투하 이후 기간은, 일본의 패전이 아니었으면 끝나지 않았을 식민 통치에서의 탈피와 광복과 자주권 반환의 경사스러운 날이 되었다. 반대로 8월 6일, 즉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진 그 날은 일본에서는 희생을 애도하는 날이며 또한 희생된 수만의 목숨을 세계적으로 엄숙하게 추모하는 날이기도 하다.  

일본의 퇴거로 일순간 정권이 진공 상태가 된 한국에는 다른 강대국들이 손을 뻗기 시작했다. 2차 대전이 끝난 시점에 한반도의 중앙에는 38선이 그어졌고 이를 기준으로 이북은 소비에트 연방의, 이남은 미국의 군정이 시작되었다. 1950년부터 1953년까지 계속된 한국 전쟁으로 이와 같은 분단은 끝을 맺는 듯했으나, 전쟁은 휴전으로 마무리되었고 남북 분단은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



사진 17: 현일영. (1945) 광복을 기뻐하는 사람들
대한민국과 일본의 전후 관계

1965년 대한민국과 일본은 “상호의 복지와 공통의 이익을 증진”하기 위해 ‘한일 기본 조약’, 즉 양국 간의 일반적 국교 관계를 규정하기 위한 조약에 서명을 한다 (Article IV: Treaty on Basic Relations between Japan and the Republic of Korea, 1965 [22]). 대한민국 정부를 한국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인정하며 1910년 이전에 맺어진 모든 조약 및 협정을 무효임을 확인하는 것이 주요 골자였다.

이와는 별도로 대한민국과 일본 간의 재산과 청구권에 대한 문제 해결을 위해 청구권 협정도 맺어졌는데, 이는 식민 시대와 관련된 모든 청산 문제를 일단락 짓는 목적이 있었다. 일본이 당시 물가로 한국에 차관 2억 달러와 무상 3억 달러를 “대한민국 경제 발전에 도움이 되는 데에 쓰이는 조건”으로 제공하는 데에 한일 양국 모두 동의했다. 또한 한일조약은 기술이전과 투자 기회도 마련하였다. (Article I: Agreement on the Settlement of Problems Concerning Property and Claims, 1966 [24])

1996년 1월 국제연합(UN) 인권위원회는 세계 2차대전 당시 전시 군 성노예에 대한 특별 보고서를 발행했다. 보고서는 해당 현상이 “성 노예의 경우가 분명”하다며, 1965년 조약이 “일반적으로 인권 침해, 구체적으로는 군내 성 노예 문제에 대해 다루지” 않았다고 기술했다. 따라서 1965년 한일조약은 일본 정부에 대한 개인의 청구권을 해결하지 않았음도 분명히했다 (United Nations Commission on Human Rights, 1996 [23]). 이에 더해 보고서는 ‘위안부 여성’에 대한 법적 책임을 받아들일 것과 피해자에게 직접 보상을 지급할 것, 또 전범행위에 대한 진정한 속죄로 교육 제도를 통해 국민의 인식을 제고할 것을 권고했다 (United Nations Commission on Human Rights, 1996 [23]).  

시간이 상당히 흐른 뒤인 2015년 12월 28일, 한일 양국은 일본이 한국의 생존 피해자에게 미화 약 830만 달러를 지급하는 조건으로 위안부 문제를 종식시키는 골자의 ‘한일 위안부 합의’를 타결했다. 새 협정은 한국은 “일본이 요구사항을 충족한다면 해당 문제를 ‘영구적이며 불가역적으로’ 해결된 것으로 여길 것”이라 했다 (BBC News, 2015 [8]).

그러나 이 협정문 내용에 정작 생존 피해자의 의견은 전혀 반영되지 않았음에 따라, 위안부 피해 여성들은 이 협정에 만족할 수 없었다. 게다가 협정문은 피해자 개인에게 직접적으로 보상을 제공하지 않았을뿐더러 일본이 법적 책임을 지는 것 또한 요구하지 않았다. 위안부 피해자인 이용수 할머니는 “피해자를 정말 염두에 두고 협상이 진행되었는지 잘 모르겠다”라고 말했다 (BBC News, 2015 [8]).   



사진 18: (2015) 세계2차대전 당시 일본군의 성 노예로 일하도록 강제징용당했던 위안부 피해 여성들이 일본 아베 신조 총리의 미국 방문에 반대하며 서울의 일본 대사관 앞에서 시위하는 모습. 출처
http://www.apimages.com.

과거 문제를 일괄 해결, 청산하는 것이 2015년 협정의 목적이었으나 반대는 계속되었다. 아베 총리는 2차 세계 대전의 종전 70년 기념 연설에서 이러한 보상에 대한 내용은 전혀 언급하지 않았으며 위안부나 강제 징용에 대한 직접적인 인정도 회피했다. “전쟁터 뒤의 여성들”이라는 언급이 위안부 여성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했음에도 이들이 그 “일(Abe, 2015 [1])”에 강압적, 강제적으로 동원되었다는 말은 일절 하지 않았다.

이러한 모호함과 회피로 아베 신조의 연설문은 아시아의 여러 매체로부터 폭넓은 질타를 받았다. 게다가 아베 총리의 불분명한 연설은 일본 무라야마 도미이치 전 총리의 1995년 종전 50주년 기념 연설과는 너무도 극명한 차이를 보인다. 과거 도미이치 총리는 그의 연설에서 일본의 식민 지배와 침략에 대해 명백하게 사과했다. 위안부 여성이나 노동자 강제 징집 여부에 대한 일본 정부의 일관성 없고 불명확한 관점은 곧 피해자들이 입은 고통에 대해 일본이 얼만큼의 책임을 감당해야 하는가에 대한 일본인들의 혼재된 정서를 비추는 거울이라 할 수 있다(Mizoguchi, 1993 [17]; Joyce, 2007 [11]).

2018년 1월, 세간의 추측과는 다르게 문재인 정권이 2015년 한일 협정을 폐기하지 않기로 했다는 사실이 보도되었다 (Tatsumi, 2018 [19]). 그러나 전시 강제 징용에 대한 대한민국 대법원의 최근 판결 이후 양국의 긴장감이 고조되면서 한국 정부는 2018년 11월 23일, 설립 2년 4개월 만에 2015년 협정으로 설립된 ‘화해·치유 재단’을 해산 결정을 발표했다. 이 결정은 협정이 전쟁 범죄에 대해 일본의 책임을 묻지 않는 데에 대한 여론과 피해자의 반발에 일부 기인한다 (Kim, 2018 [12]). 아직 기금 문제는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으나 한국 정부는 법적 조치를 취할 준비를 하고 있으며 이는 일본 정부의 분노를 샀다 (Haas, 2018 [7]).

3-1-2. 기억의 정치

역사 속에 혼재하는 다양한 관점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한국과 일본의 역사 서술 방식처럼 서로 다른 집단이 얼마나 다른 서술 방식을 취하는지에 대해 보다 깊이 깨닫게 되었다. 이러한 역사 해석 논쟁은 ‘기억의 정치’라고도 불리며, 우리가 목도하는 작금의 지정학적 분쟁에도 상당한 영향을 주고 있다.  

스탠퍼드 대학의 사회학 교수이자 아시아태평양연구센터 소장인 신기욱 교수는 동아시아 내의 기억의 정치로 일어난 긴장 상태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간결하게 요약했다.

전쟁과 식민주의에 대한 기억 차이는 심각한 인식차와 의혹을 일으키며 역사적 화해를 어렵게 만들고 있다. 결과적으로 화해를 위한 중대한 첫 발걸음은 첫째, 각 국가의 ‘역사적 기억’을 구성하는 주요 요인을 확인하고 이해하는 것이며 둘째, 그 요인들이 차지하는 무게가 서로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한국과 중국은 일본 보수 엘리트층이 가진 (독일과는 상반된) 피해 의식이 어디서 어떻게 생겨나는지와, 이 피해 의식이 어떻게 일본의 주변국과 화해하는데 중대한 장애물이 되고 있는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마찬가지로 일본은 일본의 침략이 남긴 흔적이 중국인과 한국인의 집단 정체성에 얼마나 중심적 역할을 하는지를 인식해야 한다

(Shin, 2015 [9]).

신기욱 교수가 지적한대로 지역적 화해를 이끌어내려면 분쟁중인 국가들의 상호 이해가 필수불가결하다. 그러나 상호 이해에는 공통된 역사에 대한 각 국가의 다른 해석법에 대한 인지가 선행되어야 한다. 이번 사건에서 일본의 관점은 국제 사회 내에서 상당히 많이 공유되는 데에 반해 한국의 관점은 상대적으로 인지되지 않는 경향을 보며, 우리는 이번 장에서 한일 양국의 역사적 관계에서 어두운 부분으로 남아있던 한국의 관점을 조명하려 한다.

이번 장이 공통된 이해와 화해를 향한 발걸음에 도움이 되기를 간절히 희망한다.

역사 수정주의와 서양의 책임

한국인의 눈에 일본은 언행일치가 되는 만족할 만한 사과를 아직 하지 않았다.

앞서 언급되었던 1966년 유엔 인권위원회의 보고서가 보여주듯이 국제사회 전반이 일본의 책임 및 국제 인도주의 법 준수에 대한 필요를 인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계속해서 1965년 한일협정에 따라 일본이나 일본 기업에 대한 개인의 청구권도 모두 종결되었다는 공식 입장을 견지하고 있으며, 보상에 대한 모든 요구 일체를 거부하고 있다. 나아가 일본의 교과서는 일본이 세계2차대전동안 자행한 잔학행위를 심각하게 호도하고 있으며 제국주의 일본이 저지른 전범행위를 충분히 다루지 않는다. 이는 다수에게 비판받고 있는 일본의 역사 수정주의에 상당부분 기여하고있다 (Oi, 2013 [6]).

일본 점령기에 자행한 성 착취나 강제 징용에 대한 적극적 부인은 오늘날까지도 지속되고있다. 2018년 11월 29일자 ≪재팬 타임스≫는 ‘편집자 노트’에서 ‘강제 노동’과 ‘위안부 여성’을 현 정부의 보수 어젠다와 합치하는 용어로 수정했다. 기사는 다음과 같다.  

“과거 ≪재팬 타임스≫는 오해의 여지가 있는 용어를 사용했다. ‘강제 노동’은 세계 2차대전 기간에 일본 기업에서 일하도록 고용된 노동자들을 지칭하는데 쓰였다. 그러나 노동 조건이나 노동자들이 고용된 방법이 다양하기 때문에, 앞으로는 ‘강제 노동’ 대신 ‘전시 노동자’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유사하게 ‘위안부’여성은 ‘세계 2차대전 당시 일본군에게 성 노동을 제공하도록 강요받았던 여성’을 뜻했다. 그러나 각지에서 위안부 여성 각자가 겪은 경험이 다양하기 때문에 지금부터 ‘위안부’ 여성은 ‘자신의 의지로 일했던 여성을 포함하여 일본 군인에게 성 노동을 제공한, 전시 공창에서 일한 여성’을 뜻하는 말로 하기로 결정했다(Japan Times, 2018 [11]).” 

(Japan Times, 2018 [11]).

이렇게 부끄러운 줄 모르는 역사 수정 시도는 당연하게도 국제적 공노를 샀으며, 비평가들은 일본이 “무섭고도 우려되는 전개이며… 전통적인 (역사) 부정 행위”를 통해 일본의 전시 역사를 다시 쓰려 시도하는 동시에 일본 언론이 우익 정치가들에게 굴복했다고 비판했다 (Romo, 2018 [8]; McCurry, 2018 [5]; South China Morning Post, 2018 [2]).


사진 19: 재팬 타임스 [2018년 11월 29일자 편집장의 말. 일본의 제2차세계대전 역사관에 의해 핵심 단어를 새롭게 정의하여 역사학자들과 인권운동가들의 우려와 빈축을 사고 있다.] 출처 http://twitter.com/

전후 일본이 전시 역사를 수정하려 했던 시도는 이전에도 있었다.

2007년 6월 14일 발행된 ≪워싱턴 포스트≫에는 ‘사실(The Fact)’이라 제목이 붙은 유료 광고가 게재되었다. 이 광고는 일본 ‘역사적 사실 위원회’라는 보수 단체에서 게재한 광고로, 일본 정부는 여성들이 일본군의 성 노예로 일하도록 강요한 적이 없으며 위안부 여성은 모두 자발적으로 가담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Soh, 2008 [16]).

이 광고는 일본 정부가 “세계화하는 인권 문화를 포용하고 위안부 여성에 대해 적극적인 지지”를 표명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일본 진보 세력에 대한 보수 세력의 반대 로비였으며, 미 하원에서 계류 중이던 “전시 종군 위안부에 대해 정식으로 사과하고 책임을 묻는 (Soh, 2008 [16])” 결의안의 채택을 막으려는 시도의 일부였다. 2012년엔 본 광고의 수정 버전인 ‘우리는 사실을 기억한다 (Yes, We Remember the Facts)’라는 광고가 ≪더 스타레저(The Star Ledger)≫지에 실렸다. 일본의 현 총리인 아베 신조는 2012년 발행된 이 광고에 공동 서명한 저명한 정치 지도자 중 한명이었다. 그는 같은 해 일본의 총리의 자리에 올랐다.

이러한 책임 회피는 전시 강제 징용 문제까지 이어진다. 이 주제에 관해서는 역사의 어두운 시기를 다루는데 있어 일본과 독일이 택한 방식을 보면 그 극명한 차이를 잘 느낄 수 있다.

독일과 일본은 두 국가 모두 민간 기업을 위해 노동력을 강제 동원한 역사가 있으나, 독일은 전시 행위에 대한 책임을 지고 화해를 위해 상당한 노력을 들였다. 독일은 전시의 기록을 대중에게 공개했으며 정부와 시멘스, 크루프, 다임러-벤츠를 포함한 기업들은 생존자와 그들을 지원하는 단체에 오랫동안 보상을 해 왔다.

반대로 일본 정부와 기업들은 국제 사회의 도덕적, 법적 압박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강제 징용 피해자에 대한 보상 지급을 거부하고 있다 (Haberstroh, 2003 [4])4.

한 예로 일본 미쓰비시사는 조선소와 탄광, 나가사키의 공장들에서 수천 명의 조선인 강제노동자뿐 아니라 영국,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미국 출신의 전쟁 포로의 노동력을 착취했던 역사가 있다. 후에 미쓰비시는 노동 현장에 전쟁포로를 강제 동원한 데 대하여 공개적으로 사과했으나 나가사키 조선소 단지를 비롯한 다른 곳에서 일어난 전쟁포로 강제 징용에 대해서는 사과를 하지 않고 있다. 한국의 강제노동 피해자들에게 사과하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Palmer, 2015 [5]).

이에 더해 서양 국가들, 특히 미국은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시점에 한국과 미국에서 시행된 군정으로  일본이 역사수정주의의 길을 처음 걷도록 만든 핵심 국가로서 막중한 책임을 지고 있다.  

일본을 점령한 연합국은, 미국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지휘하에 1946년 도쿄 전범 재판에서 전범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된 일왕 일가를 적극적으로 보호하기 시작했다5. 이는 일왕 및 그 일가에게 면죄부를 줌으로써 체제를 유지하여 존속 시키는 것이 일본 내 연합군 군정의 입지를 다지는 데에 더 효과적일 것이라는 맥아더의 미군정책 위주 판단 때문이었는데, 그로 인해 맥아더의 부하들은 도쿄 전범재판 수개월 이전부터 일왕 일가의 책임 면제를 위해 각 전범 혐의자들의 증언을 은밀히 조직했고, 재판에서는 “진주만의 궁극적인 책임은 도조 히데키 (전쟁 당시 일본의 총리)”에게 있음을 선언했다. 결과적으로 연합군 최고사령부 맥아더는 일왕 히로히토를 전범으로 기소하지도 처벌하지도 않았으며, 도리어 “전쟁의 책임이 일절 없는 성자와 같은 사람으로 변모”시켰다 (Dower, 1999 [2]).



사진 20: 전범재판소의 광경. 판사석(우측), 피고(좌측), 검사석 (뒷쪽) 출처  https://apjjf.org

이러한 미국의 정책이 일본인들이 자신의 과거와 현재에 대해서 생각하는 방식에 부정할 수 없는 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일본군의 최고 통수권자인 왕이 책임이 없는데  일반 국민이 자신들 몫의 죄책감과 책임감을 감당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다우어가 이야기했듯 “히로히토 왕은 책임도 없고 질 의무도 없는 전후 일본의 중요한 상징으로, 또 조력자로 부상”했다 (Dower, 1999 [2]). 당시 미국 정권의 선택은 전후 일본 정체성의 기초를 만들었으며, 따라서 일본의 역사 수정주의에 미국 군정이 끼친 영향은 사실상 반박할 수 없다 (Gady, 2015 [3]).

미국이 진두지휘한 이 역사 수정주의는 일본인이 과거 일본제국이 여타 아시아 국가에 끼친 영향을 부정하도록 상황을 조성했다. 이러한 선택적 기억은 일본으로 하여금 과거 전범 행위를 부인하고 성 노예, 강제 징용, 화해와 보상에 대한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면서 일본과 주변국의 정치적 관계에 지금까지도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식민지를 통치했던 다른 많은 국가는 역사적으로 잘못된 점을 바로잡고 과거 침략에 관해 자국민을 교육하는 데에 상당한 노력을 기울여왔다. 그러나 일본은 전시 역사를 계속 수정하면서 한국과 기타 아시아 국가들에 자행한 폭력에 대해 유감을 나타내는 일관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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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OTNOTES

  1. Hyun, Soon. “Declaration of Independence: English Translation ” Texts. East Asian Library, 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 March 1, 1919. Korean American Digital Archive.http://digitallibrary.usc.edu/cdm/ref/collection/p15799coll126/id/14680. 이 버전은 1919년 탑골공원에서 낭독된 독립선언문의 원 영어 번역본이다.
  2. “Gov’t Designates 669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Sites Overseas.” YON – Yonhap News Agency of Korea, May 10, 2005. General OneFile (accessed November 29, 2018). http://link.galegroup.com.ezproxy.neu.edu/apps/doc/A132280483/ITOF?u=mlin_b_northest&sid=ITOF&xid=322c2126. “(번역) 대한민국은 총 669개의 해외 장소를 19세기 초 독립운동과 관련된 장소로 선정했다 (중략) 기념비와 기념물이 세워진 곳은 대부분 중국, 러시아와 미국이다 (중략) 정부는 사적지 보호를 위한 위원회를 설립할 예정이다.”
  3. Korean Economic Society. Correspondence. “고려경제사 – Koryo Kyongjesa. 1944-1945.” Correspondence, December 1944. Korean American Digital Archive. http://digitallibrary.usc.edu/cdm/ref/collection/p15799coll126/id/3675. “(번역) 한국인은 실제적 입증과 미래 계획을 통해 자유와 독립을 관리할 능력이 있음을 보여주어야 했다”
  4. Haberstroh, John. (2003). In re: World War II Era Japanese Forced Labor Litigation and Obstacles to International Human Rights Claim in U.S. Courts. Asian Law Journal. Vol. 10. No. 253. Retrieved from https://heinonline.org pp. 254-257. A committee in the International Labor Organization investigated WWII-era forced labor in Japan. It found that 17.5 percent of the 39,935 Chinese taken to work in Japan had died by war’s end; he adds that no reliable death figure exists for the Korean labors; For Japan’s refusal to release documents about its forced labor and its systematic destruction of WWII documents, See Gregory Clark. (2000, February 7). The Nanjing Number Game. Japan Times.  http://www.japantimes.com 에서 발췌. (“ (번역) 그 많은 상세한 전시 기록 중 파괴되지 않고 온전하게 남아있는 자료가 우연히 대만 관리의 손에 들어갔다. 이것이 우리가 중국 강제 노동에 대해 알 수 있는 이유이며 이는 부정 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일본 정부는 기록상 한국 강제 노동자의 숫자는 11만명에 불과하다 주장한다. 그러나 실제는 4백만에서 6백만명이라는 천문학적 숫자의 한국인이 동원되었다는 연구가 있고, 이중 72만 5천명이 탄광과 공사현장에 투입되었다고 한다. 일본 강제노동자 추정치에 대한 정보는 Macintyre, Donald. (1996, November 15). WWII: Imperial Japan on Trial. Asiaweek; Leicester, John. (2000, August 24)참고. Chinese Forced Laborers Are Suing Japanese Firms for Compensation. Seattle Times.
  5. Dower, J. W. (1999). Embracing Defeat: Japan in the Wake of World War II. W.W. Norton & CoPrint. (번역) 다우어는 ‘연합군 점령기’에 맥아더가 행사한 권력의 크기를 강조했다. 엄밀히 말하면 일본에서 공식적인 연합국의 위치는 ‘상당한 정도의 협의 지위’를 행사하는 것이었으나, 실제로 군정기는 엄격한 계층형 권력구조를 통해 운영되었으며 맥아더에게 전면적인 의사결정권한을 부여했다. 역사학자들은 미국 점령이 전후 일본의 기초를 다졌다고 평가한다.